뤼미에르 형제 & 조르주 멜리에스와 영화의 발전

2022. 7. 23. 07:03영화 배경, 영화 제작, 영화 연기, 장르 이론

뤼미에르 형제 & 조르주 멜리에스와 영화의 발전

뤼미에르 형제 & 조르주 멜리에스와 영화의 발전
뤼미에르 형제 & 조르주 멜리에스와 영화의 발전

지금 우리들이 영화관에서 입장료를 내고 관람하듯이 한자리에 모여서 영화를 보게 된 것은 뤼미에르 형제 덕분입니다. 뤼미에르 형제를 영화의 아버지라고 하죠. 1895년 프랑스의 사진사 루이 뤼미에르(Louis Lumiere, 1864∼1954)와 오귀스트 뤼미에르(Auguste Lumiere, 1862∼1954) 형제였습니다. 이 형제가 만들어 낸 '시네마토그라프(cinematograph)'가 어찌 보면 지금 우리가 영화를 보는 형태의 영사기를 가진 최초의 장치였죠. 그들은 에디슨이 발명한 발명품들을 가장 효과적으로 개조하였을 뿐 아니라 또 그의 발명품을 능가하는 것을 만들어 내는 데 성공하게 됩니다. 뤼미에르 형제가 국가산업진흥협회에서 그들의 영사기를 전시했죠. 12월 28일에는 프랑스 파리 시내 그랑 카페 카퓌신에서 1프랑을 받고 그들의 영화인 <기차의 도착>을 최초로 상영하게 됩니다. 그들이 영사하는 데 사용했던 '시네마토그라프'는 카메라뿐 아니라 영사 기능도 같이 있었습니다. 기차의 도착은 50초의 짧은 내용의 작품이죠. 지금으로 얘기하면 그것은 다큐멘터리였습니다. 기록영화였죠. 뤼미에르 형제의 <기차의 도착> 무성영화가 재생 중입니다. 이 영화는 아무런 스토리도 없이 단순히 열차가 도착하는 장면만 보여주는 것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19세기 후반의 사람들에게는 충격이었죠. 기차가 바로 자기 앞으로 다가오는 것 같은 충격을 받아서 카페에 있던 모든 사람들은 경악했고, 스크린에서 열차가 달려올 때, 진짜 열차가 달려오는 것으로 착각해서 비명을 지르고 난리가 났습니다. 그것에 힘입어 뤼미에르 형제는 유명해졌고,<기차의 도착>또한 상당히 유명한 영화가 됩니다. 그래서 엄청난 인기를 끌어서, 영화는 다음 해인 1896년에 베를린, 런던 등 유럽 주요 도시에서 상영하게 됩니다. 그때 그 극장이 지금 아직도 프랑스에 있죠. 그랑 카페 카퓌신은 1875년에 시작된 카페입니다. 아직도 현장에 남아서 영화 탄생을 기념하는 카페로 남아있고요, 많은 관광객들이 그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며 그 옛날 영화가 처음 선보였던 장소를 음미하고 있습니다. 뤼미에르 형제의 '시네마토그라프'는 에디슨의 '키네토스코프'보다 훨씬 작고 기동성이 있었습니다. 이는 영화의 피사체를 선택하는 데서 명백히 드러났죠. 그들은 스튜디오 안에서 작업하는 대신 야외에서도 작업할 수 있게 만들었습니다. 뤼미에르 형제가 처음으로 만든 영화는 기록 영화로 공장 종업원들이 일을 마치고 공장의 문을 나서는 모습을 한 곳에서 촬영한 <뤼미에르 공장의 출구>였는데, 전체 상영 시간이 1분에 불과한 다큐멘터리, 즉 기록영화였습니다. 그런데 관객들은 뤼미에르 형제가 만들었던 다큐멘터리 스타일의 기록영화는 너무 단순해서 만족하지 못했습니다.

다양한 실험을 거치게 된 영화

영화는 점차 다양한 실험을 거치면서 관객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스토리로 거듭나게 됩니다. 영화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또 다른 인물이죠. 조르주 멜리에스입니다. 조르주 멜리에스는 프랑스에서 마술사로 활약을 했고요. 굉장히 다양한 발명 욕과 상상력이 풍부했습니다. 이 조르주 멜리에스가 영화 제작에 매료되면서 1896년부터는 직접 영화 제작에 뛰어들었죠. 그는 특수효과 촬영을 위한 세계 최초의 영화 촬영 스튜디오를 건립하는데요. 거기서 직접 영화 세트도 세웠습니다. 1902년 <달 세계의 여행>을 만들다가 우연히 발견한 이중 촬영과 페이드인과 페이드아웃, 촬영 속도의 조정 등을 개발해서 영화 표현의 폭을 아주 넓혔습니다. 또한 편집 원리를 처음으로 도입하여 극영화의 원조라고도 할 수 있는 작품들을 발표했습니다. 멜리에스는 영화적 흥미와 흥행으로서 영화의 중요성을 인식했던 최초의 사람인 것이죠. 또한 그는 무성영화의 한계를 절실하게 느껴서 유성영화 기기의 개발을 시도하는 등 추후에 탄생될 유성영화를 예고하기도 했습니다. 그의 작품으로는 <로베르 우댕 극장에서의 한 부인의 증발>(1896), <드레퓌스>(1899), <달 세계의 여행>(1902), <걸리버 여행기>(1902), <불가능 세계의 여행>(1904), <해저 20만 리>(1907) 등 상당히 다양한 작품 활동을 했던 감독이기도 했습니다.

기술발전과 영화의 발전

언제나 어떤 것이 탄생할 때는 탄생을 주도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에디슨과 뤼미에르 형제는 영화를 위해서 상당히 많은 연구과 작품들을 했고, 그것을 산업으로도 연결을 시켰습니다. 조르주 멜리에스는 특수효과, 최초의 편집 기법, 여러 가지 다양한 영화적 상상력을 넓히는데 일조를 했죠. 극영화의 원조이자, 최초의 영화 촬영 스튜디오, 유성영화의 개발을 단서를 제공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영화가 탄생하기 위해서는 상당히 많은 사람들의 노력이 필요합니다. 단순히 영화를 만든다라는 개념보다는 영화는 과학과 함께하기 때문에 영화 탄생에는 과학의 발전이 항상 함께 했고요. 그러면서 계속해서 과학과 영화는 함께 걸어가고 지금도 함께 걸어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표현하지 못한 많은 것들이 과학이 발전하게 되면서 표현하게 되었죠. 여러분 영화를 탄생하게 한 에디슨, 뤼미에르 형제 꼭 기억해주시면 좋겠습니다.